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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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용수 | 등록일시 : 2021-10-21 08: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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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쓰면서 인간 세상은 이유 없이 개에게 탓하곤 한다. 겨울 담장에 소복이 솟아오른 말고 흰 눈이 견심(犬心)인 듯한 데 말이다. 인간들은 허구한 날 모든 것이 개 같은 세상 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싶다. 한마디로 이런 세상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애꿎은 네발짐승을 탓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심각한 논박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인간들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빗대면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탓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주체가 자신들이란 점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 볼썽사납기도 하다. 어쨌든 이 세상에 사는 개들이 뭐라 한 적은 없지 않은가? 단지 이 세상에 개들은 주인이 가난뱅이든 부자든 상관없이 주인이니까 꼬리치고 맴맴 돌고 멍멍 짖는다. 아울러 어떤 경우이든 개는 주인이 기분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이름이 된다. 주인이 즐겁다고 메리(Merry)라 부르면 메리(즐거운 강아지)가 되고, 행복할 때 해피(Happy)라 부르면 해피(행복한 강아지)가 되어 주인의 기분을 충족 시켜 준다. 우리 주변에서 어찌 개만 한 충복(忠僕)이 따로 있겠는가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는 반려견(伴侶犬)이요 고양이를 포함한 귀여운 동물을 애완동물(愛玩動物)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실 핵가족 시대에 머무는 인간에겐 쓸쓸한 단면이지만 인간에게 개만큼 소중한 벗도 없다. 어쨌든 이 시대를 이끄는 인간이기에 지혜롭고 슬기롭게 살아가야 할 숙제도 인간에게 주어진 듯하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살아온 그 험난한 여정을 과거와 현재 속의 맑고 맑은 강아지의 눈빛으로 바라봄이 새로운 의미를 주는 듯이 비쳐온다. 아마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속에 삶의 흔적을 옮기는 듯하다. 사실 요즘 도심 골목에선 기발한 아이디어로 등장하는 애견 숍의 간판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면, “멍멍아 야옹 해봐” 등인데, 사실 멍멍이가 어떻게 야옹야옹하겠는가? 우리 주변이 그럴 정도로 삶 속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세상으로 변해갔으면 하는 바람이 살짝 담겨 있는 표현일 것이다. 여하튼 이보다 좀 더한 이야기가 야릇한 기분을 쏟아내기도 한다. 애견 숍 용품이나 사각 진열대에 갇힌 강아지들이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시절이 찾아온 것이 요즘이기도 하다. 어쩜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불현듯 근래에 벌어졌었던 해외 토픽감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미국의 어느 견주(犬主)가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도중에 호숫가를 빙 돌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불쑥 나타난 새끼 악어가 강아지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에 당황한 개 주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주둥이를 벌리고 강아지를 구해냈다는 영화 속 장면 같은 신문 기사 내용이었다. 우리 일상 속에서 개의 위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장난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서구 문명국가에서는 집안에 갇혀 있는 강아지의 스트레스를 고려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 산책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는 한다. 사실 이 정도면 옛 어른이 말씀하신 개 팔자가 상팔자요 개가 주인인 시절이 맞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서 복슬강아지가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강아지에 대한 추억도 남다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엔 흙 마당에서 뒹굴며 주인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누렁이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어찌 누렁이만 있었겠는가? 간혹 검둥이도 있었고, 흰둥이도 메리(즐거운 강아지), 해피(행복한 강아지)라고 주인이 부르는 대로, 한글을 쓰는 땅 위에서 외국어 이름을 사용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요즘의 귀여운 복장과 웰빙 문화의 혜택을 받으면서 영양 상태까지 완벽한 강아지와는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싶다. 사실 그 당시 아주 열악한 주거상태에서 귀여운 친구가 누렁이었다는 기억이 또렷하다. 어쩌면 비교가 안 되는 생활문화의 여건에서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것이 개의 일생이요 개 팔자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잠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의 귀엽고 토실토실한 강아지가 그러하듯, 당시의 복 돌이 복순이도 누렁이란 이름으로 혹은 검둥이와 흰둥이란 이름을 오가며 주인에게 충성(忠誠)을 다하는 충견(忠犬)이었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반갑다고 마당을 뱅뱅 돌며 꼬리 치고 반겨준다. 그런데 어찌 이뿐인가 싶은 순간에는 누렁이 생(生)의 마지막이 찾아온다. 어느 날 사라진 강아지는 혹서의 계절 여름철에 주인의 영양보충을 위한 보신탕(補身湯)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테면 인류를 위한 최후의 봉사로 어느 가정에서인가 건강의 일선에서 최후의 생(生)을 마쳤던 것이었다. 2021년 9월 海東 김용수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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