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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용수 |
등록일시
: 2018-05-11 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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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정의는 입맞춤이 가능할까
정의의 문제가 간단하게 정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의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부터 미란다의 해방신학적 관점까지 다양하게 논의된다. 이는 정의의 문제가 주어져 있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합의, 혹은 사회적 조건과 여건에 따라 취사선택해야 하는 문제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논의는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투자에 의해 생산된 가치, 혹은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치를 창출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런 경우 1차적으로는 질적인 측면의 문제보다는 양적인 문제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적 관점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분배’를 하든, 극단적인 경우지만 플라톤식의 정의론적 관점에서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국가의 계획에 의한 분배’를 하든 생산된 가치를 분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의의 논의가 교육의 문제로 옮겨가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우선 사회적 정의론에서 경제적 가치의 분배는 최종적인 가치가 되지만 교육은 생산된 가치를 분배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제적인 분배의 문제는 가치의 희소성에 기반한 문제지만 교육의 경우는 그런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지식의 획득과 정보의 양이 누구에게 독점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더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지식을 나눠준다고 해서 지식을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식을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진다. 경제적 가치는 분배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교육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교육이 제도적인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교육이 비록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희소성으로 인한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더구나 인터넷은 모든 수준에서 다양한 학습을 가능케 한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자신만의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다른 사회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와 달리 정의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물론 정의의 개념을 교육제도에 의해 창출되는 교육적 가치를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의 문제로 본다면 상황은 다시 달라진다. 제도적인 형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교육활동, 혹은 어떤 식의 학교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 예컨대 평준화 제도를 고수할 것이냐, 아니면 다양한 종류의 학교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 등으로 귀착될 수 있다. 특히 이런 제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교육에서의 정의문제는 자연스럽게 교육의 기회균등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흔히 교육정의에서 교육의 기회균등 문제가 거론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는 교육을 제도에 의해 교육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너무 좁은 의미에서 본 것으로 한계가 존재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회교육, 평생교육, 최근 더욱 확대되어가는 대안교육, 홈스쿨링 등의 문제, 나아가 교육제도의 기반이 되는 사회체제의 문제, 다원적 가치관을 교육제도에 반영해야 하는 문제 등을 포함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제도의 문제로 모든 교육정의를 설명하기란 역부족이란 것.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과거 한 재벌 대기업의 자녀가 사회적 배려 전형으로 국제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학생은 대재벌의 자녀였지만 분명히 한 부모 가정의 자녀였다. 사회적 배려전형은 한 부모가정의 학생들에게 입학의 혜택을 주는 일종의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전형이다. 고교입시나 대학입시에서 사회적 배려를 하는 것은 모두 이런 맥락이다. 그럼에도 돈이 많다는 경제적 사실과 한 부모 자녀라는 취약점이 충돌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와서, 결국 교육에서 정의의 핵심문제는 교육을 분배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 만일 분배의 대상이 된다면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분배냐, 계획에 의한 분배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고교평준화 문제, 특목고와 자사고 문제, 대학입시에서의 지역균형 선발, 농어촌 우선전형, 사회적 배려전형 등 수많은 문제들이 교육과 관련된 정의의 문제들이다.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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