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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웅들의 이야기(김용수 엮음)
작성자 : 김용수 등록일시 : 2018-06-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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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세기경 그리스의 영토는 끊임없는 이주로 혼란스러웠고, 전쟁은 에게 문명의 마지막 흔적을 파괴시켰다. 수세기 동안 그곳은 북쪽으로부터 이주의 물결이 이어졌는데 일부는 정복자들이었고, 다른 이주자들은 평화로웠던 옛날 이주자들이 남하하였다. 그들의 지배자는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곳에 숙달되어 있는 산악인으로 강건하고, 호전적이며, 운동 경기에 능한 도리아인들이었다. 그들은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도시 국가를 건설하여 번영해 갔으며,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면서 지중해 세계에 그리스 문명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8세기경에는 서양 문화를 대표하는 찬란한 그리스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그리스인이 정착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시 국가가 세워졌고, 도시 국가들은 그들 간의 문화적 경쟁에 예민하였다.
도시 국가에서는 신을 숭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여진 운동 경기가 최초로 교육의 일부가 되었으며, 제전 경기를 통하여 그리스 전체의 친선과 단결을 도모하였다. 도시 국가들은 모든 시민에게 봉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운동은 더 이상 귀족적인 것이 아니었다. 모든 도시 국가는 김나시움과 팔레스트라를 세웠다. 도시의 종교 생활이 정착되면서 규칙적인 휴일과 축제가 조직화되었고, 여기에다 경쟁에 대한 국가적 열망이 자유로운 활동을 찾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운동, 음악, 춤 등의 모든 문화 활동에서 경쟁적인 형태로 나타나면서 제전 경기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동족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제전경기를 통한 범 그리스적 정신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각 도시 국가마다 다른 점은 있으나 제전 경기 가운데 코린트지방의 이스트미아 경기, 네미아 지방의 네미아 경기, 델포이 지방의 피디아 경기, 그리스 올림피아 지방의 올림피아 경기가 대표적인 4대 제전 경기이다.
이들 4대 제전 경기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고 성대했던 것은 올림피아 올림피아 평원에 제우스신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 형상, 경기장 등의 시설이 있는 장소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에서 거행된 제우스신을 위한 제전 경기였다. 최고의 신인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전 경기였던 올림피아 경기는 지방 행사에서 점차 그리스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성지 올림피아에서 민족의 단결과 번영 그리고 평화를 기원하며 수호신인 제우스에게 올리는 제례 행사에서 시작된 고대 올림픽 경기는 그리스 서쪽 해안에 있는 올림피아 평원에 위치한 엘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공동 제전은 올림피아 제전이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의 윤리관이나 가치관 등의 이념을 잘 구현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 공동체를 유지하는 문화적인 틀이 되었으며, 사회적 통합을 수행하는 정치적인 기능에서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원래 올림픽 기원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올림피아(Olympia)에 있는 제우스 신전에서 유래한다. 엘리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시작된 올림피아 제전은 오늘날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세계의 축제가 되었다. 현대 올림픽과 다른 점은 그리스의 경기는 시와 예술의 요소가 함께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시와 예술과 노래의 우아함을 격렬한 운동 경기에 접목시킴으로써 야성적인 경기조차도 감성적으로 조화시켰다. 경기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던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나 로마인들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투 경기에 비해, 그리스인의 체육 경기야말로 인생 투쟁을 유희 형식으로 바꾸어 놓은 단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올림픽 경기의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더욱이 올림픽과 관련된 신화도 아주 다양하게 전승되어서 더욱 혼선을 빚게 한다. 우선 제우스가 알크메네(Alcmene)와 결합하여 낳은 헤라클레스 이다이오스(Harakles Idaios)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올림피아로 와서 아우게아스(Augeas)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엘리스를 정복한 뒤 승리를 기념하여 경기를 확립하였고 올리브관을 상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탄탈로스(Tantalos)의 아들 펠롭스(Pelops)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소아시아로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와 피사(Pisa)의 오이노마오스(Oinomaos) 왕과의 전차 경기에서 승리하여 그 기념으로 대회를 창설하고, 오이노마오스(Oinomaos) 왕의 외동딸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와 결혼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구혼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뒤 펠롭스는 피사의 왕국뿐만 아니라 히포다메이아와 결혼하였고,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서 올림피아 제전경기를 창설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우스가 크로노스(Cronous)와 레슬링을 하여 이긴 후에 또는 아폴론이 헤르메스와 달리기를 하여(혹은 아레스와 복싱을 하여) 이긴 후에 승리를 자축하는 대회를 만들어 젊은 신들과 첫 경기를 가졌다는 신화가 있다. 모든 영웅들은 다른 사람을 앞서려고 노력하는 선수들로 표현되어 있으며, 경기에 대한 열정과 친근함의 흔적이 언어에서도 잔존하고 있다. 일정한 거리를 측정하는 말로서‘원반던지기를 할 정도의 거리’,‘창던지기를 할 정도의 거리’라는 관용적 표현은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다(김복희, 2002: 17).

체육 경기의 기원은『일리아스』를 보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레스가 죽었을 당시 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아킬레우스가 상품을 내걸고 경기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경기는 일종의 장례 의식의 일환으로 시작된 셈이다.
아주 초창기에 한동안 올림픽 경기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올림피아 근처의 피사와 엘리스가 서로 싸웠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펠로폰네소스에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엘리스의 이피토스 왕이 전령을 보내 신탁을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내렸다.“그대들의 조국을 살찌게 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제전을 개최하여 우정을 두텁게 하라.”결국 이피토스 왕은 피사 사람들과 싸움을 끝내고 올림피아 경기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올림피아 경기의 부활은 정치적으로 평화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최혜영, 2008: 39).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시작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기원전 5세기에 히피아스라는 인물이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의 이름을 기록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경기는 매 4년마다 개최되었으며, 기원전 776년부터 기원후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약 1,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리스는 엘리스의 올림피아 제전 이외에도 피티아, 네메아, 이스트미아 제전 등 4년 만에 한 번 혹은 2년 만에 한 번씩 열리는 축제들이 있었다.

델포이를 중심으로 열리던 피티아 제전은 아폴론 신이 뱀 괴물 피토를 죽인 것을 기념하여 열렸다고 알려져 있다. 음악 축제를 원형으로 하여 처음에는 8년마다 한 번씩 열리다가 582년경부터는 매 4년마다 한 번씩 열렸다. 올림피아 경기가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3년째 되는 해에 열렸는데, 음악 경기, 문학 경연과 함께 체육 경기도 벌어졌고, 시, 산문 등이 읊어졌다. 상은 템프 계곡의 월계수관이었다. 이스트미아 축제는 포세이돈을 기려서 코린트의 이스트무스에서 벌이는 것이다. 이는 581년경부터 매 2년마다 올림피아 해의 3년째 되는 해에 열렸다. 경기들은 다양한 체육 경기이며 상은 솔가지 혹은 마른 샐러리관이었다. 네메아 경기의 기원은 헤라클레스가 네메아 지방의 사자를 죽인 것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고 한다. 혹은 테베를 원정하러 가던 7인의 용사와 한 아기의 죽음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고도 한다. 기원전 573년 제정되어 올림피아 경기의 매 2년째와 4년째 열렸고 주로 소년 체전이 중심이었고, 상은 야생 샐러리관이었다(최혜영, 2008: 89).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원래 올림픽 제전은 엘리스와 피사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재개되었지만 점차 그리스 전역은 물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확대되면서 휴전 기간이 한 달에서 두 달로 늘어났다. 이때는 전쟁 시기라 할지라도 모두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도시국가 간의 화합이 이루어졌다. 지역에 따라 특성과 준수 수준에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몇 달 전부터 휴전이 선포되고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기 사용은 금지되었다.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런 장애 없이 그리스를 여행할 수 있었다. 이를 어기면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여러 제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물론 올림피아 제전이다.
초기에는 종교적인 제전의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의 올림픽 스타디움은 제우스신의 성지였고, 선수는 신의 제물이 되는 상징적 의미로 제단쪽으로 달렸다. 그래서 경주의 출발점인 서쪽에서 제우스 제단까지 통로가 개방되어 있었고, 다른 삼면은 비탈지게 만들어 관중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제단으로 가는 통로를 벽으로 막고 비탈지게 축조하였다. 이는 점차 종교성보다 경기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승자의 이름은 기원전 776년에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 해를 최초의 올림픽 경기 개최 연도를 잡는다. 그 이후부터 기원 후 393년 로마 제국에 의해서 강제로 폐지되기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약 천 년 동안이나 4년마다 7월 하순이나 8월에 대회를 개최하였다.
초기의 올림피아 제전은 엘리스 주변의 지역 폴리스만으로 한정되었고 종목도 스타디온 경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이 참여하게 되고, 경기 종목도 확대되었다.

4년마다 열린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 제우스 신전에서 처음에는 경기 기간이 하루였던 것이 제7회 경기부터 3일간 계속되었고, 그 후 제전 의례를 비롯하여 5일 동안 벌어졌다. 둘째 날 약 700m 길이의 U자 트랙 경기장에서 달리기,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레슬링으로 구성된 5종 경기가 열렸고, 셋째 날에는 5종 경기에 속하지 않은 모든 육상 경기가 치러졌다. 마지막 날인 다섯째 날에는 완전 무장을 한 남자 선수들의 중거리 경주가 벌어졌다.

올림픽 경기의 종목은 제1회부터 13회까지 달리기 경주 트랙을 왕복 달리는 디아올리스 경기에 이어서 장거리 달리기인 돌리코스 경주가 도입되었다.
만 하였지만 점차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레슬링, 복싱, 전차 경기 등이 포함되면서 아주 다양해졌다. 달리기,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레슬링 등의 5종 경기(pentathlon)는 기원전 708년에 도입되었다. 이후 복싱, 경마, 판크라티온(pancratium: 손과 발 등을 사용한 것으로 레슬링과 복싱의 중간 형태), 전차 경주가 추가되었다. 나중에는 나팔수와 전령을 위한 경기도 추가되었다. 그리스뿐 아니라 소아시아,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리디아, 이집트, 키레네 등 전역에서 이곳을 찾아 왔다. 올림피아는 전 그리스인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며, 도시 국가 사이의 협약과 조약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예술가, 시인, 철학자들은 올림피아 경기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알렸으며, 장사하는 이들은 물건을 전시하거나 파는 기회로 삼았다(최혜영, 2008: 39-40).
참가하려는 경기자들은 김나시온(Gymnasium) 김나시움은 체육관을 뜻하는데, 어원은 김노스(gymons, 나체)이다. 김나시움은 청소년들이 옷을 벗고 하는 경기나 승마, 레슬링, 복싱, 원반던지기 등을 할 수 있는 넓은 운동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일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부르는 말인 김나지움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에서 30일간 훈련을 하였다. 이는 체류 비용이 적거나 다른 선수들보다 현저하게 기량이 부족한 이들은 사전에 기권하게 만드는 선수 숫자의 조정 효과도 있었다. 제전 경기의 첫날 운동선수와 심판, 친척들은 손에 벼락을 쥐고 있는 제우스 상 앞에서 선서를 하였다. 경기의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스타디움의 입구에는 이 벌금으로 세워진 상들이 있는데, 그 첫 비문에는‘올림피아에서는 빠른 다리와 체력으로 이길 수 있지, 돈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새겨져 있다. 선수들이 승리하면 전령은 선수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도시의 이름을 외쳤으며 올리브관을 수여하였다. 여기에는 오늘날처럼 은메달도 동메달도 없었고, 오로지 한 명의 승자만 있을 뿐이었다. 패자들은 동료나 동향인 누구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하였고, 심한 패배감을 안고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올림피아의 심판관인 헬라노디카이는 자주색 예복을 입고 엘리스의 특별 생활 구역인 헬라노디카이온에서 경기 시작 전부터 십 개월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경기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한편, 감찰 업무를 맡아 선수들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였다. 경기 참가 자격은 처음에는 그리스 혈통을 가진 자유민 출신으로 품행이 방정한 사람에게 제한되었는데, 이들이 종교상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지, 휴전을 저해하지 않았는지, 근친상간 주의할 것은 고대 그리스의 근친상간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복 혹은 이부) 형제간에 결혼을 하고 또 삼촌과 질녀 간에도 결혼을 하였다. 이는 근친상간의 개념에 들어가지 않는다.
의 죄는 없는지를 감찰하였다.
심판관들도 뇌물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을 볼 것이며, 선수들의 합격, 탈락 사유를 일반인에게 누설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경기시에는 경기 우승자를 확정하고, 시합이 끝나는 즉시 종려 가지를 수여하고 우승자 명부에 등록하는 일도 맡았다. 종려나무 가지는 맨 마지막 5일째 되는 날 올리브관을 주기까지 우승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종려나무의 생(生)가지는 무겁게 내리누르면 오히려 저항하여 튀어오르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압박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는 상징으로 종려나무 가지가 수여되었다고 플루타르크는 전한다. 로마의 작가 겔리우스(Gellius)는 왜 우승자에게 종려나무를 수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전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Probleme』의 제7권에서 이 일을 설명하고 있으며, 플루타르크의 저서『Simposion』 제8권에서도 기록되어 있다(김복희, 2002: 5).

로마의 작가 겔리우스(Gellius)는 왜 우승자에게 종려나무의 가지를 수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종려의 잘라낸 가지에 무게를 가하여 점점 더 무겁게 내리누르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생가지는 밑으로 처지지 않고 그 힘에 저항하여 오히려 위로 튀어 올라온다. 플루타르크의 말에 따르면 이 나무는 압박과 중압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는 성질을 가졌으므로 승리의 상징으로 수여하였다(Gellius Ⅲ. 6; 심은섭, 1983: 237).

이와 같이 종려나무 가지는 탄력에 있어서 휘어지거나 압력에 굴하지 않기 때문에 승리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으며, 각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는 시합 직후에 우승자임을 표시하는 종려의 가지를 상으로 받았으며 시상식에 갈 때 손에 들고 갔던 것으로 보인다(김복희, 2002: 5).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는 승리하는 사람에게 올리브 관(cotinos)과 종려나무 가지 및 우승자의 머리띠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엘리스 전통 신화에 의하면 헤라클레스가 올리브를 이식해 왔다고 한다. 혹은 7회 이전의 우승자에게는 원래 빨간 사과를 상으로 주었는데, 이피토스 왕이 델포이 신탁에 따라 야생 올리브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가 올리브를 이곳에 심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위해 경쟁하였다.
그렇지만 올림픽 경기 우승자가 고향에 돌아가면 성대한 개선식이 열리고 각종 특권이 주어졌다. 가령 평생 세금을 면제받거나, 사제직이나 장군 또는 지휘관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권과 대우는 도시마다 달랐다. 무료 식사가 제공되고, 세금이 면제되고 공공장소의 기념 석주에 이름이 새겨져 특별대우를 받았다. 혹은 평의회의 명예직을 받기도 하고 다른 도시들의 명예 시민권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스파르타의 경우, 우승자들에게는 전쟁시 왕의 곁에서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가 전 지중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우승자에게 상금이나 연금이 주어지는 일이 생겼다.
나아가 올림픽 경기 외에도 각 도시국가별로 수많은 제전이 생겨 여러 경기를 돌아다니며 상금을 타는 전문 직업선수들도 등장하게 된다. 크로톤 출신 선수 아스틸로스가 기원전 488년 달리기 경주에서 2관왕을 차지했을 때, 크로톤 사람들은 그에게 조각상을 세워주고 집을 주었다. 그러나 4년 뒤 아스틸로스가 시칠리아 왕을 위해 시라쿠사인의 자격으로 올림픽에 나가자 크로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조각상을 부수고 그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김나시온의 팔레스트라에서 신체 훈련은 전쟁시 활약할 전사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하였기 때문에 더욱 확산되었다. 운동 경기의 인기는 페르시아 전쟁 때 절정에 달했는데, 동방의 이민족 무리를 제압한 것도 훈련된 자유 도시민의 신체 단련의 결과였다고 믿어졌다.

고대 교육의 커리귤럼과 프로그램은 영육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간의 육성에 초점을 두고, 구체적으로 무시케(musike), 문학, 신체 단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오늘날과 그리스 시대 교육의 가장 큰 차이는 조직이라기보다 내용, 특히 신체교육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7세에서 16세 사이는 교육 시간의 절반 이상은 김나시온의 팔레스트라(palaistra)에서 보냈다. 김나시온은 중심에 훈련장 팔레스트라가 있었고, 지붕이 덮인 통로가 직사각형을 중심으로 나 있었으며, 오일과 마사지실로 사용되는 여러 방 그리고 넓은 휴게실인 엑세드라 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 운동 경기에는 아주 특이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운동선수들이 나체로 경기를 했다는 것이다. 나체경기의 관습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보면 페트로클로스의 장례의식을 치른 후에 벌어진 복싱경기에서 양 선수들이 허리옷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국부만을 가리기 위해 허리에 묶은 아주 간단한 옷으로 페리조마(perizoma)라 불렀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 이후부터는 나체로 경기를 하는 관습이 생긴 걸로 보인다. 흔히 최초로 나체 경기를 시작한 사람은 스파르타인이라고 한다. 둘째, 운동선수들이 몸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경기를 했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기 전에 몸 전체에 기름을 바르고 모래나 먼지를 뿌렸는데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로 인한 체온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하여 몸이 황갈색으로 그을린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셋째, 운동을 할 때 아울로스(aulos) 현악기는 리라(lyra)였고, 주요 관악기는 현대의 오보에나 클라니넷 같이 내부의 리드로 진동이 생기는 아울로스(aulos)였다. 아울로스는 하나의 파이프였지만 보통은 두 개의 파이프가 있는 디아울로스(diaulos)였는데, 디아올로스는 2스테이드, 즉 왕복달리기 명칭으로 사용되었다(Waldo E Sweet, 1987: 183).
라 불리는 일종의 피리를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통해 단지 신체만이 아닌 영혼의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러한 피리 연주는 모든 운동 경기에서 흘러나왔다(장영란, 2005: 73-74).

그런데 김나시온이라는 말이‘벌거벗은’이라는 뜻의‘gymnos'에서 나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나체로 운동을 하였다. 올림피아 제전에서도 선수들이 나체로 경기하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이 왜 나체로 경기를 했는가 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흔히 하는 이야기로는 초창기 때 오르시포스라는 선수가 달리기 경기 중에 허리를 둘렀던 가리개가 땅에 떨어졌으나, 그냥 달려 우승을 하였고, 그 후로 다 벗고 하는 것이 동등한 조건이 되므로 그 후로는 벗고 경기를 하게 되었다는 설과 여자는 참관할 수 없었는데, 자기 아들의 경기를 보고 싶어서 트레이너로 변장한 한 어머니가 여자임이 밝혀진 사건 이후로 감독도 경기장에 나체로 출입해야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는 파우사니아스의 이야기나,‘페리조마’라고 해서 남성의 급소 부분을 가리고 경기하는 그림들이 도자기 등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나체 경기가 일반화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인 듯하다. 투키디네스에 의하면 최초로 나체 경기를 한 사람은 스파르타인이었다.
오늘날에도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서 운동화에서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것으로 미루어보아서, 그 당시 스파르타인은 나체가 기록 단축에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입었던 옷은 매우 거칠고 질이 낮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입고 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옷을 벗고 달리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페리조마 탓에 걸려서 넘어진 선수들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페르시아 전쟁 때문이라고도 본다. 헤라도토스, 투키디데스, 플라톤 등 여러 작가들의 글을 통해서 볼 때, 리디아, 페르시아 등의 아시아 쪽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인의 특징은 나체를 건강함이었으며,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야만인의 표시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리스 교육은 신체단련과 음악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체육을 통해서 신체를 단련하고 음악으로 정신을 다스려”(Plato, Politeia. 376 e; 박종현, 1997: 165) 균형과 조화로운 시민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복희 2006: 134).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음악은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상한 일부”(Aristoteles. Politica. 1337a11; 최민홍, 1973: 56)라고 하였다. 프로타고라스도 “예의 바른 균형 잡힌 청년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음악의 역할이 중요하며 리듬과 조화를 통하여 더욱 정확하게 된다”(Andre Bernand, 2003: 174)라고 강조하였다(김복희 2006: 134).

또는 나체 경기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민주 정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김나시온의 팔레스트라에 나체 경기가 도입된 것은 더 꾸밈없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나체로 훈련함으로써 그들이 이상으로 추구하는 군살 없는 황갈색 피부의 신체미를 기를 수 있었고, 의복의 차별이 없어지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나체가 그리스인의 조각들을 보면 남근을 그대로 다 드러낸 남성 전신 조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오히려 옷을 입고 감추는 것을 결함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였던 성의 개념과 나체에 대한 생각들은 오늘날과 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최혜영, 2008: 44-45).
근래 고고학적 발굴에 힘입어 경기가 벌어졌던 곳을 분석한 바에 의하면 선수들이 달리기를 하였던 경주로인 스타디온의 목표 지점은 신전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신들의 입장에서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이 자신의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자는 올리브관을 씌워 주고 그의 팔뚝에 붉은 끈을 묶어주는데, 이것은 우승한 그 사람이 바로 형식적이긴 하지만 신 앞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신화나, 비극이나 춤, 섹슈얼리티, 생활양식, 예술, 체육 경기는 물론이고 철학까지도 폴리스 문화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인의 진정한 신앙의 대상은 폴리스였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다.
신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며 즐기던 그리스인들, 그리고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준 그리스의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 속에 그려진 그리스의 신들. 이러한 문화의 총체 속에서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신과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했었는지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인들의 사고가 단순히 유쾌한 신화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종교적인 차원 속에서 강압적인 사회적 힘을 형성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고 종교적인 질서를 어지럽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고발당했던 고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를 기억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독배를 마셔야 했던 지혜의 소크라테스와 아테네가 또다시 철학자를 죽이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아테네를 몰래 떠나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역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철학자들뿐만 이니라,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당했을 핍박을 그리스인들이 신과 더불어 자유롭고 즐거웠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종교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그리스의 종교적·정치적 실권자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이용하여 그리스인들을 억누르고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와 같은 흔적을 여러 가지 자료와 근거를 들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행사로 대중을 움직일 수 있었던 그리스 사회를 충분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올림픽의 초기에서 제13회까지 올림픽 유일 종목인 단거리달리기(stadia)에서 우승한 선수는 제1회 대회에서 에리스 코리보스(Koroibos)였고, 이어서 13회 대회까지 단거리달리기(stadia) 한 종목만 진행되는 가운데 메세네(Messene)국이 7차례 우승하였으나, 영웅적인 선수로 기억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제21회 대회와 제22회 대회에서 아테네의 판타크레스(Pantakles)가 스타디온 종목에서 연속 우승했으며, 스파르타의 히오니스(Chionis)는 스타디온과 왕복 스타디온(디아울로스)에서 29회, 30회, 31회 연속 3회 우승했다.
또한 스파르타의 힙포스테네스는 레슬링 부분에서 39∼41회까지 3연승해 조국과 개인의 명예를 드높였다. 스타디온 종목에서 스파르타 선수들은 35∼42회까지 8연승하였다. 스파르타 청소년의 경기 지도에서 언제나‘빠른 발과 손’을 사용해 이길 수 있는 종목을 집중적으로 장려했다(양병우, 1998: 106). 스파르타는 선수 스스로가 패배를 선언한다는 이유로 복싱과 판크라티온 경기에 출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스파르타 레슬링 선수인 헤티모크레스는 45회∼48회까지 4회 연속 우승했으며,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일컬어지는 크로톤의 미론(Milon)은 62회∼66회까지 5연승 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 올림피아 대회의 소년부 레슬링에서 우승한 후 올림픽 성인부 레슬링에서 연속 5회 우승하였으며, 그밖에도 피티아 게임에서 7회, 네메아 게임에서 9회, 이스트미아 게임에서 10회 우승했으며, 그가 획득한 승리의 월계관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Ekdodike Athenon, 1982: 266-267). 그는 소년기에는 어린 송아지를 연습 상대로 체력 훈련과 레슬링 기술 연습을 시작했는데, 1∼2년 뒤 점차 성장하는 송아지를 연습 상대로 하여 기능과 힘을 길렀다. 그는 월등히 강한 체력으로 시합에서 최고의 善을 이루어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되었다.
시실리아 낙소스 출신인 티산드로스는 복싱에서 52회∼55회까지 4연승해서 영예를 안았다. 소년부 종목들이 37회 대회부터 점차 추가되는 가운데, 단순한 기록에만 의존해도 52회에는 네 명의 우승자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종목 수도 최소한 4종목 이상이었을 것이다. 제 96회 대회에서부터 경연 종목에 트럼펫과 전령사(Heralds) 종목이 추가되었다. 이제 올림픽 경기는 그야말로 다양한 경기로 변화하게 되었으나, 제례경기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되었다. 엘리스의 티메오스가 제96회(B.C. 396) 경기의 트럼펫 종목에서 우승했고, 불세출의 트럼펫터인 메가락국의 헤로도로스는 제113회 대회부터 122회 대회까지 연속 10회 우승하여 뭇 사람들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로도스 출신의 레오니다스는 154회부터 157회까지 스타디온, 왕복주 그리고 무장경주 종목의 모든 월계관을 휩쓸었다.
로마시대에 접어들게 되어 올림피아 경기를 로마로 옮겨 진행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제211회 대회(A.D. 65)에 로마의 폭군 네로는 전령사, 비극경연, 피리, 새끼마귀 전차경주, 전차경주, 10두 전차 경주에 출전하여 우승했다고 전하는데, 전차경주는 낙마했지만 심판들을 협박해 우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발리우스 에크렉투스는 고대 올림픽의 거의 종말에 가까운 제256회, 제258회, 제260회의 전령사 종목에서 4차례 우승했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복싱에서 아르메니아 바라스다테스가 우승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하여 종말을 맞게 되었다(Ekdodike Athenon, 1982: 289-296).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오랜 박해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아니 그 최후의 승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10년 뒤 로마 제국의 단독 지배를 건 결전으로 리키니우스는 고대의 신들에게 의지하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머리글자를 그린 깃발아래 싸웠다. 그 승리는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신들이 죽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치세(361-163년) 동안에 ‘신들의 부흥’을 기도한 율리아누스 황제의 노력도 헛된 것이었다. 그가 죽게 되자‘갈릴리 사람아, 당신이 이겼다’고 말했다지만, 실은‘태양신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대의 신은 그를 도울 힘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379년 황제로 추대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그는 381년에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거나 그것으로 점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신전에 참배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그 때부터 신전의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기본은『로마 제국 쇠망사』에‘로마의 거의 모든 속주에서 광신자들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마구 평화로운 주민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건조물들의 폐허가 그 야만인들이 파괴한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야만인들만이 그와 같이 힘든 파괴를 할 시간과 성미를 가진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제293회 경기가 열린 393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올림피아 제전을 금하였다. 그리고 426년에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모든 신전의 파괴를 명령하고, 올림피아에도 파괴와 약탈의 손이 미쳤다. 그리하여 페이디아스의 걸작인 제우스신상의 머리를 멀리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져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4세기 이후로 일어났던 알페이오스의 범람은 올림피아를 완전히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버려진 집이 된 올림피아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6세기 이후에 수차례 걸쳐서 찾아온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그 위용은 더 이상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천년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올림픽 경기가 그냥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다시 금령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5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의 제식에서 나온 그 경기는 그때 다시 그들의 제식으로 되돌아가서 소원인 풍작을 위해 끈질기게 지속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2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지속된 이 운동 문화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1776년 영국의 여행객인 리차드 챈들러가 올림피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식자(識者)들의 기억 속에서만 화려하게 옛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2017년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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