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체육은 체육·스포츠계와 교육계 양자 모두의 관심사이지만 현실은, 왜곡되어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동안 체육·스포츠계에서는 학교운동부를 중심으로 한 학생선수 육성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엘리트 스포츠에 치중한 결과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일반학생들의 체육활동은 관심 밖이 된 반면 학생선수는 경기력 향상에만 치중해 청소년 시기에 습득해야 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채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교육계에서는 학교체육이 거의 무관심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학년이 될수록 체육시간은 다른 과목 공부를 위한 자습시간으로 운영되는 반면 학교운동부는 학교 밖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당연시됐다. 일반학생의 체육활동 참여는 경시하고 학생선수에게는 오직 경기 성적만 강요하는 학교 스포츠 정책 환경에서 학교체육은 수십 년간 정체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체육은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 민주화의 새로운 전환기를 지향함으로써 자유롭고 활력 있는 체육·스포츠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치,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국민의 체육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체육·스포츠는 오랜 기간 동안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국내에 처음 대학 내 체육학과가 들어선 것은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과이다. 1945년 10월 이화여자대학교에 체육학과가 창설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체육학의 학문적 발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화는 전문학교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45년 9월 학생을 모집하고 10월말에 개강하였다. 이 때 이화여자대학교는 3개 대학 즉, 한림원(문과, 교육과, 체육과), 행림원(의학과, 의학예과, 약학과), 그리고 예림원(음악과, 미술과)으로 출발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최초로 체육과를 창설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교양과목의 일환으로 행하여 온 체육과목이 우리나라 최초로 고등기관에서 체육학과를 창설함으로써 전공과목으로 승격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홍양자, 1995: 52). 이 때 학과는 보건 위생, 생리 중심의 성격이 짙은 학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과정은 이론과목으로 물리학, 위생학, 운동생리학, 심리학, 해부학, 구급법, 근육운동학, 유희이론 등이 개설되었고 실기 과목으로 육상경기, 농구, 덤블링, 정구, 배드민턴, 피아노, 포크댄스, 캠핑, 한국무용 등이다. 이론과목은 자연과학 위주로 편성되었으며 실기과목의 경우에는 다양한 스포츠종목은 물론 피아노를 포함한 무용이 함께 교수되었다(홍양자, 1995: 52). 이후에 다양한 학과들이 생겨났고 아직도 생기고 있는 중이다. 해방 후에 학교에서는 전인교육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지덕체를 강조하게 되었다. 체육은 전인교육의 실현을 위하여 요구되는 교과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즉 신체를 위한 교육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체육과를 사범대학 내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체육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시대적 필요성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제3, 4공화국의 국가 체육·스포츠 정책 추진은 건민체육(健民體育)으로, 국위 선양을 위한 우수 선수 양성과 국민 체위 향상을 통하여 체육·스포츠 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체육·스포츠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와 같은 체육·스포츠 정책이 활성화되면서 1972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3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사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우리는 체력이 곧 국력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국력의 증강은 국민의 체력에 달려 있으며, 국민 체력 향상은 곧 국가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대한체육회, 1972: 3).
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건민체육(健民體育)이었으며, 반공을 주요 이념적 근간으로 하여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바탕 위에 체육·스포츠 활동이 실시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정신은 국가나 사회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상당 수준 적용되었고, 어느 정도 강요되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스포츠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아래 상당 부분 희생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운영하였지만, 각종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획득하여 스포츠 강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으며, 국민들의 사기 진작과 국민 통합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 이어지는 1980년대 체육 선진화 정책은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 체육·스포츠 시대를 열었던 제3, 4공화국의 체육?스포츠 정책이 꽃 피운 결실인 동시에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체육?스포츠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제5공화국의 산물이기도 하다. 제3, 4공화국이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체육활동을 통해 경제 개발을 위한 국민적 단합과 체력 향상을 추구한다.’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앞세워 체육·스포츠 정책을 마련하고 내외적인 체육·스포츠 환경을 조성했다고 한다면, 제5공화국은 ‘체육입국(體育立國)을 표방하며, 스포츠 강대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이학래, 2000: 668). 한편으로는 1960년대 이후 보건·체육 시간을 증대시켰으며, 중·고등학교 입시성적에 학생 체력검사 점수를 반영하였다. 1970년대부터 학교체육을 내실화하기 위한 학교 체육·스포츠 프로그램의 다양화도 추진되었다. 1972년 학교 체육·스포츠 강화 방침에 따른 내실화 방안으로 제시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첫째, 먼저 전교생이 참가하는 학습지도 프로그램 둘째, 학습지도 프로그램에서 얻은 지식과 기능을 더 개발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참가하는 교내 프로그램 셋째, 교내 프로그램에서 더 한층 발전하고자 하는 특별한 팀이나 클럽으로 조직하여 행하는 과외활동 프로그램 넷째, 스포츠 기능이 우수한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외 경기 프로그램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대한체육회b, 1972: 108-109).
또한 학교체육 강화 방안 방침에 따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체육 교육과정 지도내용을 구체화하여 세분화하고, 체육교과 시간을 늘리면서 체육교사 강습회, 체육 장학 사업을 실시했으며, 체육 전문교사 배치, 과외 체육활동 강화, 체육 특기자 육성, 체력장 제도 정착 등을 골자로 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는 체육부의 창설과 직제 개편으로 학교 체육·스포츠에 대한 정부의 행정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으며, 1990년대의 학교체육 또한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주지주의(主知主義) 교육정책으로 학교 체육교육이 실종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청소년들의 신체적·정서적·사회적 발달을 도모함으로써 원만한 인격도야와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학교체육은 문민정부 등장 이후 부각된 주지주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점차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민정부가 주지주의 교육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게 됨에 따라 입시교육에 파묻혀 학교체육은 침체와 파행이 불가피해졌고, 체육행정의 난맥상이 드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게 되었다. 물론 그 뿌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제5공화국은 ‘스포츠는 국력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986년 하계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 하계 서울올림픽대회에 대비하여 ‘체육부(體育部)’를 신설하게 됨에 따라 체육·스포츠 정책이 엘리트스포츠에 치중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학교체육을 소홀히 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문교부는 학교체육을 체육부에 떠넘겨 학교체육진흥을 위한 정책적 의지를 상실했고, 체육부는 학교체육의 교육적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기력 향상만을 생각하여 학교체육 본연의 기능이 실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김택호, 김용수, 2012: 4). 지금까지 학교운동부의 변화를 가로막아 온 가장 큰 장애물은 학생선수는 운동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인식이었다.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공부와 운동 병행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하는 것은 학교 체육?스포츠 활동 개선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다. 학부모와 학교가 변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좋은 정책도 현실성을 잃게 된다. 공부와 운동 병행의 필요성을 적극 홍보하고 다양한 정책 성공 사례를 도출해 학부모 등 현장 관계자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당면하고 있는 학교 체육?스포츠 정책의 과제이다(스포츠 서울, 2010년 11월 3일). 이 책과 관련 있는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이강우(1994)「한국스포츠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관한 연구」, 김종희(1994)「박정희 정권의 정치 이념과 체육정책에 관한 연구」, 이욱렬(2001)「전두환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체육 정책 비교 연구」, 이종원(2002)「제5공화국의 스포츠정책 연구」김대광(2003)「한국 체육정책의 변천과정과 방향 설정」, 박혜란(2003)「김영삼 정권의 체육정책에 관한 연구」, 황수연(2003) 「한국 체육행정의 변천 연구」, 최홍희(2005) 「국민체육진흥정책 전개양상의 단계별 특징에 관한 연구」, 박혜란(2005) 김영삼 정권의 체육정책에 관한 연구」, 구강본·김동규(2005) 「지방 분권화와 체육정책의 목표와 과제」, 김형익(2008) 「군사정권과 문민정권의 한국 학교체육정책에 관한 비교연구」, 이근모(2008)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학교체육정책의 비전과 과제」, 이용식(2008)「신정부의 학교체육 활성화 방안」, 박정준(2011)「통합적 스포츠맨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적용」, 이용식(2011) 「학교스포츠클럽 정책현황 및 개선 방안」등이 있으나 체육?스포츠정책의 전반적인 내용보다는 부분적으로 학교 체육?스포츠 정책에 국한된 부문을 다루고 있어, 졸고(拙稿) 김용수(2012)「돈키호테, 체육선생의 삶」, 김택호·김용수(2012)「모두를 위한 학교 체육·스포츠 정책에 대한 소고(小考)」, 김택호·김용수·박기동(2015)「해동(海東) 선생의 체육·스포츠 이야기, 2001∼2014」, 김택호·김용수(2015)「체육·스포츠가 나아갈 길에 대한 담론(談論)」, 김용수(2015)「학교 체육·스포츠가 나아갈 길에 대한 담론(談論)』을 참고하여 보다 실질적으로 학교체육·스포츠가 나아갈 길에 대한 미래 지향적 연구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학교체육은 학생과 사회의 욕구를 고려하여 그들의 심신 발달에 알맞은 신체활동과 건강생활을 계획적으로 지도하여 장차 유능한 사회인으로서의 자질과 인격을 갖춘 인간을 만드는 의도적인 교육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지금까지 체육을 위해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체육?스포츠 정책의 공헌(貢獻)과 과실(過失)을 정책적·교육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학교체육 정상화를 위한 체육·스포츠 활동 및 방과 후 체육·스포츠 활동 방안을 함께 모색해 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연구자 스스로 기술(記述)한 자기 이야기(self narrative)로, ‘학교 체육·스포츠 활동의 변천 과정’의 체험적 경험과 ‘학교 체육·스포츠 활동이 나아갈 길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반성적 교훈을 독자 스스로 인식하고, 앞으로 학교 체육?스포츠 활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는 데 있다. 따라서 체육교사와 관리자로서 활동했던 삶에서 나타난 학교 체육·스포츠가 나아갈 길을 즉자(卽自)적 고백(告白)으로 증언한 자기 이야기 형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술 증언과 주석을 통해 객관성과 사실성을 높였고, 문제의식이 드러나도록 했다. 하지만 연구 방법과 관련하여 왜 연구자 자신을 연구 대상자를 중심으로 고찰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통해 독자를 설득하고 정당성을 부여하여야 하는 부분이 이 연구에서 미진하였다. 2018년 海東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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