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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올림픽 문화
작성자 : 海東 김용수 등록일시 : 2018-09-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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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무대로 펼쳐졌던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오늘날 동아시아 끝에 자리 잡은 우리에게 그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00년도 지난, 그것도 저 멀리 지중해 세계에서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형성됐던 그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알아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가 다시 질문을 바꾼다. 그들은 과연 우리와 무관한가?
2004년 8월 전 세계인의 축제인 제28회 하계올림픽 경기가 올림픽의 본고장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낸 승리의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기 위해 아테네로 죽음의 질주를 했던 그리스 병사 필립피데스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가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옛 아테네 병사가 달렸던 그 길을 따라 펼쳐졌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하여 페르시아는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켰다. 세 번의 전쟁에서 그리스는 모두 승리하게 되는데, 두 번째 전쟁은 아테네로부터 42.195km 거리 떨어진 마라톤 평야에서 치루어졌다. 이 두 번째 전쟁에서 필립피데스라는 병사를 시켜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종교상의 이유로 출전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테네는 격전을 거듭한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스파르타까지 달려갔던 필립피데스는 다시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아테네 성내로 달려가 승전 소식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오늘날의 마라톤 경기는 이러한 유래에서 비롯된 경기다(교육과학기술부, 2012).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광야에서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와 플라타이나 연합군 밀티아데스 장군이 페르시아군을 맞아 사투를 벌인 끝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휘하의 대군을 무찌르고, 이 소식을 전하고자 42km(당시의 실제 거리는 38km∼40km)를 뛰어가 아테네에 승전 소식 “우리는 이겼노라“라고 알린 후 유명을 달리한 아테네의 경주 선수였던 필립피데스의 일화를 간직한 곳이며, 이로 인해 마라톤 전투로 역사에 소개된 곳이기도 하다.
제1회 올림픽경기 때부터 실시한 마라톤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고대의 전장에서 전혀 희망이 없는 싸움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아테네 시민들의 꿈이 만들어 낸 경기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아테네가 전쟁에서 졌다면 여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들만이 남겨졌던 아테네 시민은 물론이고 전쟁에 나간 자신의 남편과 아들들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승리의 소식을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기에 그 꿈은 2,386년이 지난 1896년에 또다시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후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여 매년 제사를 지냈고, 출정식에 앞서 추모경기를 거행했다. 이 역사적 일화를 근거로 하여 마라톤 경기는 근대 올림픽의 제1회 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의 마라톤 경기에서의 우승은 그리스의 양치기 청년이었던 루이스 스피리돈이었다. 이 경기에서 시골 양치기 소년이 마라톤을 출발하여 38km(혹은 36.75km)를 달려와 선두로 스타디움으로 들어오자, 그리스의 시민들과 관계자들은 신비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가 마치 고대의 필립피데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전 소식을 지니고 뛰어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커다란 감회와 감동을 경험했으며 열렬히 환호했다.
근대올림픽의 마라톤 거리는 제1회에서 제3회 대회까지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 때, 원저궁의 공주가 마라톤 경기의 출발지를 자기 방 창문 밖에서 해 줄 것을 간청한 바, 대회 조직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여 이곳에서 새로 건설한 화이트 시티 경기장까지의 거리, 42.195km를 확정해서 시행했는데, 그 후 이 거리가 마라톤 경기 거리로 공인되었다. 현재 마라톤 마을에는 당시의 전투 전사자를 위한 기념 묘와 박물관이 있다(김주화, 2000: 45).
고대 시대에 이탈리아 반도와 그리스 반도는 서양 문명의 요람이자 중심지였다. 그 명성과 중요성을 감안할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주 피상적이고 빈약하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리스와 로마가 뒤얽혀 있기가 일쑤이고,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 아테네와 로마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두 문명, 두 도시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 또 아테네와 로마는 두 문명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어쩌면 영원한 경쟁 관계에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또는 아테네와 로마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서양 고대 체육?스포츠 문명을 이해하고자 한다.
오늘날 모든 개념들, 이름들이 영어식 표현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스(Greece)라는 말도 그렇다. 이는 현대 그리스 국가를 뜻하는 영어식 표현으로, 아테네를 수도로 하고 발칸 반도로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어지는 반도 국가를 나타낸다. 고대 시대는 그리스라는 나라가 없었다. 작은 도시국가들인 폴리스들만이 있었다.
그러면 그리스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스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그라이어(Graia)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인들 자신의 용어가 아니라 로마인이 그리스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기원전 1000년경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 식민시를 건설했다. 그 중에 남부 이탈리아의 키메에 식민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그리스 보이오티아에서 온 그라이아인들이었다. 최초로 그라이아인을 만난 로마인들은 다른 그리스인들을 싸잡아 그라이아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Greicia, 즉 그라이아인들의 나라라는 라틴어 표현이 나왔고, 남부 이탈리아에 그라이아인이 퍼져 살던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icia, 대그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라는 말은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시를 건설한 그라이아인들을 부르던 로마인들의 용어였던 것이다.
한편, 유럽 대륙의 시작점과 발칸 반도의 끝부분에 위치한 그리스는 오랜 기간동안 로마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지배당했으며, 그리스라는 말은 터키 지배 당시 불리던 말이고, 그리스의 원래 이름은 헬라스(Hellas)이다. 그리스에서는 지금도 헬라스(Hellas)를 사용하고, 국제 대회 때도 그리스란 명칭 대신에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불렀을까? 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Hellenes, 단수는 Hellene)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헬렌(Hellen)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헬렌은 태고의 대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들인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피라(Pyrrha)의 맏아들이었다. 테살리아의 왕이었던 헬렌은 산의 님프인 오르세이스와 결혼하여 세 아들 아이올로스, 크수토스, 도로스를 낳았고, 이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인의 세 종족인 이이올리스인, 이오니아인, 아카이아인의 시조가 되었다. 여기서 헬레네는 그리스인, 헬레네스는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는 현재와 같이 정치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고대에서 그리스란 스스로 그리스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들의 총합으로 오늘날의 그리스 영토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에게(Aegea)해 연안 지역, 흑해 연안 지역. 시칠리아 섬,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에 폴리스(Polis)라고 부르는 독립적인 소규모 국가를 세웠는데, 그 수는 무려 수백 개에 이르렀고 아티키(Attica) 지방에 있던 아테네는 수많은 폴리스 중의 하나로 다른 폴리스에 비해 그 영토가 넓고 시민의 수도 많았다.
기원전 1100년경 북방에서 내려온 그리스계 마지막 이주민인 도리아인이 미케네 문명을 파괴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정착하면서 그리스는 3세기 동안 이른바 ‘암흑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 폴리스(Polis)로 불리는 독특한 공동체들이 등장하면서 암흑시대는 끝나고 폴리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대 도시들처럼 폴리스는 마을 공동체들을 포괄했지만 그것은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
첫째, 폴리스는 명확하게 독립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낮에는 들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안전을 위해서 도시로 돌아왔다. 큰 폴리스들은 주변 지역에 예속된 마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치 조직과 권력은 도시에 집중되었다.
둘째,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폴리스(Polis)는 그 중심부에 성채(Citadel)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국가들인 폴리스가 등장하여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국가 형태로 발전해갔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의 섬들, 더 나아가 지중해 세계로 식민운동을 전개하여 폴리스라고 부르는 작은 도시국가를 세웠다. 그리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헬라스라고 불렀는데, 이는 국가라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고대 시대에는 현대 그리스처럼 그리스 반도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통일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 소아시아 에게 해, 흑해 주변, 남부 이탈리아 등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는 수백 개의 그리스인의 폴리스(Polis)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서양 고전 문명의 역사가 이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되고 폴리스 체제의 성쇠가 구대 그리스인의 역사 전개에 긴밀한 영향을 미쳤던 만큼, 폴리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더 없이 중요하다.
그리스의 폴리스(Polis)들은 중심 도시와 주변 농촌을 포함하는 작은 국가였다. 도시는 정치?군사?종교의 중심지였고, 그 중심에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 부르는 구릉형 요새가 있어서 신전이 자리하거나 유사시 최후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아크로폴리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기원전 468년에 완공된 도리아식의 거대한 신전으로 아테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세워졌다. 아테네 여신은 여러 가지 역할이 많은 여신인데, 특히 문명 생활의 수호신이고 정의의 수호자이며 또 그리스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올리브 나무를 준 여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아테네 시의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재 제1호로 현대 문화의 최고봉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테네 시 중앙에 우뚝 솟은 아크로폴리스는 도시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아테네의 상징이면서 아테네의 역사 그 자체이다. 정상이 해발 156m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아랫부분의 길이가 330m, 윗부분의 길이는 270m 그리고 폭은 156m에 이르는 달걀 모양의 거대한 석회석 바위 언덕이다. 서쪽의 올라가는 입구를 제외하고는 세 면이 모두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고대 시대 이래로 그 자체가 천연 요새였다. 고대 아테네시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성역이었고, 또한 도시국가의 인공적 방위 요새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고대의 도시국가는 어떤 도시국가를 막론하고 이 아크로폴리스를 축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리스 전역에 많이 전해지는 고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도시의 저지대에는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이 있어서 시장이나 공공 활동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테네 시민의 정치, 철학, 문화, 인생을 논하거나 상업 정보를 교환하던 곳으로 시장, 회의장, 사교장 등이 있었다.

아테네 중앙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한쪽을 바라보면 멀리 6km 덜어진 곳에 피라이우스 항구와 에게 해가 보인다. 그리고 눈을 돌려 반대편을 내려다보면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서로 만나 정치를 논하고 매매를 하고 제사를 드리고 논쟁을 벌이던 아고라 유적지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가 신들이 사는 신성한 영역이었다면 아고라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이 생생하게 전개되는 삶의 현장이었다. 아고라는 ‘모이다(아게이로)’라는 그리스 동사에서 나온 말로 ‘민회, 민회가 열리는 장소 즉 시장’을 뜻한다.

아고라는 무엇보다도 시장이었다. 시장은 주로 주랑에 개설되었다. 아고라는 종교생활의 중심지였다. 또한 아고라는 정치의 중심지로 시민들의 재판을 담당했던 시민법정이 있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서 동쪽으로 제우스 신전보다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근대적인 경기장이 있다. 그것은 근대 올림픽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판아테나이코스(Panathenaikos) 경기장이다. 이곳은 아테네의 가장 큰 축제라 할 수 있는 판아테나이아 제전이 벌어질 때 운동 경기를 하던 장소였다. 기원전 4세기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기원후 2세기 때 아크로폴리스의 헤로데스 극장을 건립했던 헤로테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재건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 이후에는 기독교 영향으로 버려져 있다가 1895년 근대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어 1896년에서 1906년에 걸쳐서 새롭게 복원되었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 고대 올림픽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가 간의 우정과 협력을 증진시키고 세계 평화를 실천하자는 의도로 제안된 것이다.
제1회 근대 올림픽은 아테네가 개최지로 선정된 이듬해인 1896년에 판아테나이코스 경기장에서 열렸다. 바로 이곳에서 고대 올림픽의 정신을 이은 근대 올림픽이 열렸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장영란, 2005: 68-69).
폴리스(Polis)의 주민은 대부분 농민이었지만 그 중심지에 점차 수공업자, 상인 등 비농업적 주민들이 많아지면서 도시의 기능도 확대되었다. 이때 귀족들은 도시로 이주해 폴리스에 형성에 주된 역할을 했고, 농민들은 주변 촌락에 그대로 거주했다. 강렬한 햇살, 푸른 하늘, 온화한 기후는 사람들을 옥외로 끌어내었다. 그리스인들은 노천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민회를 열고, 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토론과 대화를 사랑하였다. 이는 그리스인들이 남겨놓은, 지붕 아래 벽 없는 기둥이 주축이 된 건물, 야외극장과 장터, 경기장 등에서 알 수 있다(최혜영, 2008: 4).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 중엽까지 약 5세기 동안 지중해 전역에서 건설한 폴리스들을 중심으로 고전 문명을 건설했다. 따라서 폴리스는, 그 중에서도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요람인 셈이다(김덕수, 2007: 16). 오늘날 그리스의 폴리스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와 같은 몇몇 폴리스들을 근거로 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5월 1일을 ‘여름의 첫날’이라 불렀는데, 항해와 군사작전은 주로 여름철을 기다려 이루어졌다. 매일, 태양이 눈부시게 타면서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 이어지는 6월에는 온 들판이 누렇게 변한다. 늦가을과 겨울에는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고, 크게 춥지도 않다. 이런 까닭에 겨울이면 오히려 온 들판이 푸른 풀로 뒤덮인다(최혜영, 2008: 4).

그리스인의 정신을 지배하였던 것은 미와 자유를 향한 정열, 파토스였다. 선한 인간은 영(靈)과 육(肉)이 동시에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경우 미학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스인의 파토스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육신과 영혼의 이름다움을 추구한 체육경기, 춤, 성애(섹스얼리티) 등이다(최혜영, 2008: 36).
그리스인들은 모든 신들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신은 각기 자신의 고유 영역이 있고,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아테나 여신의 수많은 별칭 중 ‘도시 국가의 수호자’를 의미하는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특히 아테나 여신이 도시 국가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아테나를 숭배했던 것이다.
한편, 지중해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로마 문명은 남겨진 이름이나 개념들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로마’라는 명칭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로마의 영어식 이름은 롬(Rome)이다. 그러나 ‘롬’이라는 영어 표현보다는 ‘로마’라는 라틴어 또는 그로부터 나온 이탈리아어 표현이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시대에 그리스라는 나라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는 나라도 없었고, 로마를 포함해서 여러 도시 국가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역사학자 바로(Varro)에 연구에 의하면 영원한 도시 로마가 창건된 것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라 한다. 그 당시 ‘로마’라는 어휘는 테베레 강의 이름인 ‘Ruman'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지리적인 외형 때문에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 붙여진 ’ruma'와 ‘로마’라는 어휘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이 정복되면서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공화국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이때부터 로마의 영원성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 즉 ‘영원한 로마(Roma Aeterma)' 관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지배할 때 ’영원한 로마 사상‘은 더욱더 널리 선전되었다. 따라서 지중해 통치 시대에 국가명은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었지 이탈리아 제국은 아니었다.
로마인들도 포룸(Forum)이라 부르는 광장에서 만나 일상 업무와 공무적 업무를 처리했다. 최초 포룸은 카피톨리움 언덕, 팔라티움 언덕, 에스퀼리누스 언덕 사이에 있던 로마 광장이었다. 원래 그곳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습지였는데, 왕전 시대에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이 대하수도(Cloaca Maxima)를 설치하고 간척 사업을 해서 이용 가능한 토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저지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로마 광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들이 생겨났고, 공공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특히 로마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신전들이 세워지면서 종교 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말이 되면 로마 광장, 옆에 카이사르 광장을 시작으로 아우구스투스 광장, 네로 광장, 트라야누스 광장 등 황제들의 광장이 잇달아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로마가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한 촌락들로부터 도시국가로, 그리고 제국의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광장의 규모와 내용이 발전해갔다. 로마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도시인의 중심에는 로마 광장을 모델로 한 광장이 들어서고 그곳은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공적?사적 생활의 중심으로 발전해갔다(김덕수, 2007: 36).
중세 이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정치적 분열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861년부터 본격화된 통일 운동으로 로마를 수도로 하는 근대 국가 이탈리아가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테네와 로마는 각각 그리스와 이탈리아 수도이나 고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나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테네와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있었을 뿐이다(김덕수, 2007: 11).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많은 도시국가 중 하나였고, 로마 역시 중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에 위치한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테네인과 로마인은 고대 지중해 문명 즉,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건설자들이었다. 그리스인으로부터 로마인에게로 이어진 지중해 세계의 인생관의 바탕에는 인간 중심주의가 있었다. 특히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적인 인생관은 스토아 철학으로 로마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서기 2세기 ‘로마의 평화’의 정점에서 황제이면서 스토아 사상가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신과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은 존재한다. 또 신은 인간의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밖의 것에 대해서도, 만일 악이라는 게 있다면 신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았다. …… 인간의 고귀함은 이성에서 나온다. 너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더 이상 이성을 노예의 자리에다 방치해서는 안 된다. ……

이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 그것이 인생이었다.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은 현재뿐이었다.

현재만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는 가이다.

이처럼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물려준 인간 중심주의, 현실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神話)와 신관(神官)을 받아들였다. 그리스인들처럼 로마인들도 신들의 존재와 인간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여를 믿었지만, 신들의 본성이나 모습은 인간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다. 로마인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빼고는 인간과 다름이 없던 신들을 각종 신화와 신상, 신전 등을 통해 부각시키려 했고, 이로써 지중해 전역은 마치 신들의 세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었다. 그것은 그리스 문명이 로마를 ‘정복’한 결과였다.
로마의 대표적인 문인 호라티우스가 ‘로마는 무력으로 그리스를 지배하였지만 오히려 그리스의 문화적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로마 제국도 문화적으로 그리스를 후대에 전달하는 양자(養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였다.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을 때,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정복자인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타고 들어오는 그리스 문명의 포로가 된 것이다. 무엇이 그리스 문화로 하여금 서양 문화의 토대를 이루게 하였던가? 그리스 문화는 서양 문명 중 가장 먼저 발생한 문명이고,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해보았으며, 사람의 전신 속에 있는 영원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여러 통로로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에 관한 담론이 다른 어떤 문명보다도 널리 기억되고 유통되고 재생산되면서 전해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최혜영, 2008: 7-8).
“나의 소원은, 여러분이 아테네의 위대성을 매일보고, 아테네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페리클레스(Percles, 기원전 499~429)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인들을 추모하면서 같은 그리스인들이면서 통제되고 폐쇄적인 스파르타에 대해서 자유 시민의 도시 아테네의 위대성을 강조했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용기 있게 임할 것을 호소했다. 사실 정치?철학?역사?문학?종교 등 그리스 고전 문명의 유산은 아테네에서 나왔고,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표현대로 ‘그리스의 학교’였다. 한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지중해 세계의 모든 문명의 유산은 로마로 흘러들어갔고, 서양의 근대 문명은 로마로부터 나왔다(김덕수, 2007: 17). 그래서 프랑스의 로마사가 니콜레는 ‘우리는 모두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테네와 로마는 서양 고전 문명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시대 아테네인과 로마인은 서양 고전 문명의 창조라는 대역사에서 각각의 역할을 통해서 서양 고대 문명을 만들어냈지만, 실상 두 문명의 주인공을 비교해보면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2018년 9월

海東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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